세계를 정복한 최강의 제국, 여기에 맞서던 지상 최대의 장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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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채진성 작성일17-12-08 05:42 조회2,084회 댓글0건본문
몽골 제국은 역사상 가장 광대한 제국으로 유명하고, 당시 문명 세계의 절반을 휩쓴 몽골군의 강력함은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 입니다. 북방의 초원에서 출몰한 공동체가 곧 북중국을 휩쓸고, 동쪽으로는 고려를 넘어 일본까지 상륙했으며, 서쪽으로는 폴란드에 이르렀습니다.
이 지상 최강의 전사들의 말발굽에 중국의 황제, 페르시아의 샤, 아바스의 칼리파와 유럽의 군주들까지 모조리 짓밞혔습니다. 칭기즈 칸에 의해 1206년 몽골국이 탄생한 장장 70여년이 지난 시점의 일이었습니다.
70년.... 정확히 말하면 1279년 입니다. 맨 위의 GIF 이미지에도 나오는 부분이지만, 몽골제국의 최대 판도는 바로 1279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쿠빌라이 즉위 이후 통합된 몽골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해서 좀 애매하지만) 그렇다면 세계를 정복한 몽골제국의 발자취가 마지막으로 찍힌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였을까요? 저 머나먼 러시아의 초원? 폴란드의 기사단들? 그것도 아니라면, 저 동남아의 입구에 해당하는 대리(大理)의 왕조?
하지만 다 아닙니다. 몽골 제국이 영토적으로 완성되는 1279년은, 다름 아닌 몽골의 송나라 정복이 완료된 시점입니다. 즉, 몽골 제국의 완성은 송나라의 멸망을 마지막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송나라가 마지막이라고 하면 뭔가 좀 이상한 느낌입니다. 아니, 송나라는 몽골의 바로 코 앞이 아닌가?
1234년, 북중국을 지배하던 광대한 대제국 금나라는 몽골과 송나라의 연합군에게 공격을 받아 멸망 당했습니다. 그 이후 북중국은 완전하게 몽골의 손아귀에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북중국을 장악한 몽골은 남쪽의 송나라와 직접적인 국경을 맞닿아있었으니, 정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이긴 합니다. 헌데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몽골군은 저 멀리 중동이나 더 나아가 러시아, 동유럽까지 진군했는데, 코 앞의 적을 내버려두고 저 멀리를 먼저 손 본 뒤에 다시 돌아와 맨 앞의 적을 마지막으로 상대한다는건 정말로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내막을 살펴보면, 몽골군은 언제나 남쪽의 송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훌라구의 군대가 바그다드를 짓밞고 아랍세계가 이룩해놓은 유구한 문명을 초토화시킬때도(1258년),
바투의 장자 원정군이 폴란드의 레그니차 전투에서 하인리히의 군대를 전멸시킬 때도(1241년),
지금의 운남지방에서 베트남 북부에 이르는 대리국이 쿠빌라이의 손에 의해 멸망할때도(1253년),
30년간 인고의 세월을 거친 끝에 고려 조정이 몽골과 마침내 강화조약을 맺었던 순간에서조차도(1259년), 몽골군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송나라와 전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냥 전쟁도 아니고, 그 거대한 몽골 제국을 이끄는 대칸이 직접 이끄는 군대가 선두에 섰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뿐입니다.
전세계가 몽골 제국이 가진 거대한 힘의 일각에 무너지고 있을때, 몽골 제국의 가장 코 앞에서는 가장 거대한 싸움이 무려 수십년간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몽골과 남송의 전쟁은 1235년부터 1279년까지 무려 44년간 이어졌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소강상태도 있었고, 44년 동안 내내 싸움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번 전투가 벌어질때마다 엄청난 규모의 싸움들이 있었고, 전투가 없는 기간에도 늘 서로 전쟁에 대비하며 준비하고 있던 살얼음판 같은 시대였습니다.
이를테면 송나라의 위대한 충신으로 불리는 문천상(文天祥)이나, 결국 송나라를 멸망시키게 되는 몽골의 명장 바얀(伯顔)이 태어난 해는 모두 1236년 입니다. 자기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전쟁이 펼쳐지고 있었고, 40살도 훌쩍 넘어 그 당시 기준이라면 슬슬 황혼기를 생각해야 할 시점에서 전쟁이 끝났습니다. 전쟁이 시작할 무렵 20살의 패기 넘치는 젊은이였던 쿠빌라이 칸은 송나라 정복이 완료된 시점에서 64살의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자신들의 세대 전부를 소진했던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44년간의 전쟁이, 그냥 간헐적으로 전투가 벌어지는 식이었다면야 굳이 소개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몽골은 한두번의 승리가 아닌, 처음부터 남송을 '멸망' 시키려고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1235년의 쿠릴타이에서 몽골군은 송나라 정복을 주요 의제로 확정했습니다.(참고로 이때 쿠릴타이에서 이미 전쟁이 펼쳐지고 있던 고려에 대한 정벌도 다시 한번 의제가 되었고, 그 이후 1235년부터 1239년까지 펼쳐진 몽골군의 3차 침입에서 고려는 전국토가 몽골에 유린당하는 최악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황룡사가 불타버린것도 바로 이때.)
남송을 공격하는 몽골군은 광대한 규모로 전역을 개시했습니다. 단 1군 마저도 위협적인 최강의 몽골 군단이 3군으로 나뉘어져 서로군, 중로군, 동로군으로 진군해 왔는데, 서로군은 사천으로 중로군은 양양성으로, 동로군은 회남 지역을 공격하는 식이었습니다. 송나라의 동쪽과 서쪽 중부 지역까지 수천리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모조리 일망타진 해버리려는 작전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작전대로 되는듯 했는데, 1235년 10월 사천의 핵심지역인 '성도' 가 몽골군에게 장악 당했고, 1236년 3월 송나라의 핵심 방어전선인 양양성 마저 함락 당했습니다. 1237년에 이르자 몽골군은 동쪽으로는 황주까지 이르게 됩니다.
맹공(孟珙)
그런데 승승장구하는 듯 했던 몽골군은 바로 이 시점에서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유례없는 저항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저항을 이끈 사람은 바로 송나라 장군 맹공이었습니다.
맹공은 조상 대대로 무장을 배출한 가문의 자제였는데, 송나라에서 전문 무관은 장래적으로는 불우한 처지였습니다. 진사(進士)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은 재상이 될 수 없는게 송나라 조정의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맹공은 스스로 장수처럼 행동하기보다는 되려 도인처럼 행동했는데, 본인을 스스로 무암거사(無庵居士)라고 칭하고 군사 진영을 갖추었다가 이를 거둘 때는 늘 그 자리를 치우고 향을 피웠습니다. 재물도 싫어했고 여자도 멀리했고, 심지어 식사 마저도 정말 간소하게 먹던, 무슨 재미로 살았는지 모를 대단히 정갈한 성품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맹공은 아버지가 전쟁을 맞이해서 조직해놓았던 2만여명의 충순군(忠順軍)이라는, 일종의 사병 집단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맹공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군벌이 될 낌세가 보인다고 우려가 많았겠지만, 맹공이 워낙 고승같은 삶을 사는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의심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 '무암거사' 맹공은 강릉에 대한 몽골군의 공격을 막아냈고,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빼앗겼던 양양을 탈환했고, 기주를 수복했으며, 다시 사천으로 이동해서 그곳에서도 몽골군을 막아냈습니다. 몽골군은 야전에서 맹공에게 패배했고, 점령했던 지역도 다시 빼앗겼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는데 맹공은 한술 더떠, 몽골군의 침략으로 발생한 엄청나게 많은 유민들을 이용해 광대한 둔전을 개척하고 수리 사업을 실시, 강릉과 사천 등지에서 몽골군을 막고 버틸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데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되자 상황이 이상해집니다. 처음의 좋던 분위기를 이어나가게 되지 못하자 송나라의 방위 전선은 점점 체계가 잡히며 강력해졌고, 반대로 몽골군은 하천과 수로가 많은 남부 지역에서 기마병단을 앞세운 특유의 기동전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부터 첫단추를 잘못 끼는 바람에 40년을 고생하게 되었다는....
이 몽골군과 남송의 첫 전역은 무려 6년을 이어졌습니다. 처음만 해도 동쪽으로 서쪽으로 쓱쓱 밀어버리는 분위기였던 몽골의 공격은 맹골의 활약 이후에 지지부진해졌고, 1241년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는 바람에 결국 회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일단 물러난 몽골군은 물론 다시 송나라를 칠 생각은 가득이었지만, 당장은 새로 즉위한 '구육 칸'과 서방으로 진군해 공포의 화신이 된 '바투' 사이의 격렬한 분쟁 때문에 전쟁을 금방 속행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다시 전역이 개시된 것은 1258년, 새로 즉위한 '몽케 칸' 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몽골 제국이 내부의 다툼으로 시간을 준 그동안, 남송은 그 막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어마어마한 방위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지난 번의 전투에서 성도가 함락되며 엄청난 피해를 받은 사천 지역을 중심으로 방위 전선이 강화되었는데, 핵심은 산성방어체제였습니다. 안그래도 진입하는데 지형적으로 험준한 사천의 주요 강, 하천의 연안과 각종 교통요지의 험준한 곳에 새로 성을 쌓고, 그런 성들을 무수하게 많은 별처럼 이어지어 서로 도울 수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런 전선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갖추는 작업도 물론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되어, 몽골의 공격이 재개되었습니다. 이번 전쟁도 지난 번 전쟁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거대한 규모의 침입이었습니다.
서로군 사령관, 몽케 칸
중로군 사령관, 쿠빌라이
제 3군 별동대, 우량하타이
(사진은 수부타이. 우량하타이는 수부타이의 아들)
이 당시 몽골군의 대전략은 남송의 수도인 항주로 통하는 최단거리는 일단 무시하고, 남송의 서쪽과 남쪽에서 포위한다는 작전이었습니다. 항주로 가는 최단거리는 가깝긴 하지만, 그 길목에 엄청난 숫자로 복잡하게 꼬여있는 수로들이 득실거렸기에 기병대 위주의 몽골군 입장에선 마굴이 따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서쪽인 사천에서부터 항해서 침투하는게 가장 핵심적인 주공이었는데, 조공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오는 군대였습니다. 응? 몽골은 북쪽에 있고, 남송은 말 그대로 '남' 쪽에 있는데 무슨 몽골군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간다는 소리일까요?
맨 남서쪽의 나라가 대리국.
이 당시 몽골은 현재의 운남성 및 베트남 북부 지역의 '대리국' 을 멸망시킨 이후였습니다. 다름 아닌 쿠빌라이가 직접 멸망시켰고, 명장으로 유명한 수부타이의 아들 우량하타이가 같이 합세했었습니다. 이후 쿠빌라이는 다시 북으로 돌아갔지만, 우량하타이는 남아 있었습니다.
즉 당시 몽골군은 몽케 칸이 이끄는 부대가 사천을 뚫고 들어가고, 쿠빌라이의 2군이 그 시점에서 합세하고, 마지막으로 남쪽에서 올라오는 우량하타이까지 3군이 최종적으로 악주(鄂州)의 무창(武昌)에서 합류하자는 계획이었습니다. 이 3군 중에서 가장 중요한건, 말할 것도 없이 사천으로 진군했던 대 칸, 몽케의 군단이었습니다.
사천에 진입한 몽케 칸의 대군은 그 강력한 규모에 걸맞게 처음에는 승승장구 했습니다. 사천 지역의 대부분을 제대로 싸움 같은 싸움도 없이 손쉽게 항복시켜 장악했는데, 이제 문제는 왕견(王堅)이 지키는 조어성이라는 성이었습니다.
본래, 사천의 다른 지역들을 병합시키기는 했지만 대부분 몽골군의 기세를 보고 지레 겁을 먹어 항복한 것이라, 전투다운 전투는 조어성 전투가 처음이었습니다. 몽케칸은 반드시 조어성을 함락시키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몽골군의 정밀한 공성 병기도 너무나 단단한 조어성엔 별 소용이 없었고, 아무리 공격을 해도 송군은 계속 몽골군을 몰아내었습니다. 몽골군은 잠시 구름사다리를 타고 성 내 진입에 성공하긴 하나, 다시 큰 저항에 직면해 퇴각하고 맙니다.
몽케 칸은 전투가 전혀 예상외로 흐르자 당황해서 군사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회의에선 이곳에 소규모 병사만 남겨두고 쿠빌라이와 합류하자는 의견과, 아예 북쪽으로 도망가자는 의견까지 다양했는데 대부분은 조어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습니다. 이에 몽케 칸은 계속해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5개월이 넘도록 공성전은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몽골의 장수 왕덕신(汪德臣)은 직접 성 아래로 가서 "싸우자!" 고 도발 했지만 성에서 쏜 화살을 맞고 전사 하기도 합니다.
몽골군은 조어성에 대한 지원 자체는 계속해서 차단했습니다. 외부의 지원이 조어성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조어성의 물자는 매우 풍부했고, 수비군의 사기도 전혀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송나라 군은 대놓고 몽골군에 물고기와 밀가루를 던지며 "우린 10년도 더 버틸 수 있다." 고 으름장을 놓기도 합니다.
반면 몽골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5개월동안 싸웠지만 성과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많은 대신들과 장수들만 죽어버렸습니다. 비가 오는데다 더운 사천의 날씨는 몽골군에게는 쥐약이었고, 군중에서는 전염병이 퍼졌습니다. 더구나 몽케칸까지 병에 걸렸습니다.
결국 몽케 칸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이미 전쟁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었고, 몽골군은 모두 후퇴했습니다.
아인잘루트 전투
이 합주 조어성 전투는 본의 아니게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몽골 제국의 대칸이 사망하게 되면서, 몽골은 새로운 대 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를 열 필요가 있었고, 당시 바그다드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서진을 계속하던 서방 사령관 훌라구는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회군했습니다. 다만 일부 병력을 부장에게 맡겨 두었는데, '아인 잘루트 전투' 에서 맘루크의 부대가 이 남은 잔존 병력을 격파하고 훌라구가 남긴 부장을 처형해버리면서, 끝도 없을것 처럼 계속되던 몽골군의 서진은 이 시점에서 마침내 종료되었습니다.
아리크 부카
한편 공백이 된 대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를 열어야 했는데, 쿠빌라이는 전장에 나가 있고 훌라구는 저 머나먼 중동에서 아직도 오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몽케, 쿠빌라이, 훌라구 형제의 막내인 아리크 부카는 수도 카라코룸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쿠릴타이를 열어 자기 자신이 대 칸이 되려 했습니다. 당연하지만 다른 형제들, 특히 쿠빌라이가 펄쩍 뛴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쿠빌라이의 입장에선 미치고 펄쩍 뛸 일이었고, 당장이라도 돌아가 자신의 이름으로 쿠릴타이를 새로 열어 자기 자신을 대 칸으로 선출해야 했지만, 전장에서 쉽게 몸을 뺄 수 없었습니다. 만약 자기가 그냥 철수한다면 대리에서 올라오던 우량하타이의 별동대가 남송 군대의 한복판에 갇히고 맙니다. 우랑하타이는 같이 대리국을 정복했던 측근으로서 큰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쿠빌라이는 악주성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몽케의 사망과 아리크 부카의 대칸 즉위 준비로 인해 지원은 기대할수도 없고, 악주성을 포위하고 있다지만 남송 한복판에 자신들의 군대만 남아있으니 역으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포위된 셈이었습니다. 이대로라면 군사를 당장에 뺀다고 해도 물러날때 큰 피해를 입을 게 뻔한 상태였습니다.
가사도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악주의 수비사령관으로 이후에 재상이 되는 가사도(賈似道) 였습니다. 가사도는 조정에 알리지 않은 채 쿠빌라이와 몰래 '밀약' 을 맺었고, 쿠빌라이의 철수를 보장해주었다고 합니다. 대신, 가사도는 부교를 놓고 강을 건너 철군하는 쿠빌라이 군의 후방에 경미한 공격만을 가했고, 쿠빌라이를 물리쳤다는 '전공' 을 획득했습니다. 그야말로 서로의 속셈이 오고간 드라마틱한 장면입니다.
어찌되었건 합주 조어성에서 몽케 칸의 부대가 패배했고, 쿠빌라이 군이 악주에서 회군했으며, 곧 우량하타이 군 역시 부교를 건너 돌아갔습니다. 몽골 제국의 대 칸이 친정에 나선 두번째 대규모 작전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쿠빌라이가 돌아간 이후, 그는 약식으로 쿠릴타이를 열어 스스로를 대 칸으로 만들었고, 몽골 제국은 내전에 돌입했습니다. 간단하게 승리를 거두고 지배자가 된 쿠빌라이는 우구데이 칸과 몽케 칸이 모두 실패했던 남송 원정을 다시 재개하려고 했습니다. 다만, 이전의 패배를 면밀하게 분석한 쿠빌라이 칸은 작전을 바꾸기로 결심합니다. 광대한 영역에 풍부한 자원을 갖춘 남송을, 이전처럼 전역을 동시 타격하는 방법으로는 큰 효과를 거두기엔 어렵다고 본 것입니다. 대신, 적의 핵심적인 방어 기지에 모든 전력을 들이붙기로 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양양성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장렬한 공성전 중 하나, 양양 공성전.
그리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몽골 제국의 핵심 주력' 이 물밑듯이 쏟아져 왔고, 양양성은 그런 적을 상대로 결사적인-그렇지만 애초에 이길 수 없는 전투를 지속했습니다. 못 버틴것도 아닙니다. 양양 공성전은 무려 1267년부터 1273년까지 6년동안 이어졌습니다. 보통이라면 그만하고 물러갈 법도 한데, 몽골 제국 측에서도 가지고 있는 전력을 때려붙는 느낌으로 끝까지 전투를 지속했던 겁니다.
1268년, 무려 10만 명의 몽골 병력이 양양성을 포위 했습니다. 참고로 여몽전쟁 당시, 살리타이가 이끌고 온, 고려라는 나라 하나를 공격하기 위해 온 몽골군의 숫자가 3만입니다. (그나마도 이후 줄어듬) 성 하나의 포위에 10만명이라는 군세를 동원한게 어느정도인지 감이 오실 겁니다. 이 10만의 병력은 몽골군, 거란군, 여진군, 한족 병사가 섞인 다민족 병력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쿠빌라이는 500척이 넘는 함선을 새로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양양 주변의 하천, 수로를 장악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야말로 가지고 있는 북중국의 재력을 아낌없이 쏟아붙는 수준이었습니다.
당연한 소리지만 10만이나 되는 군사를 멍청하게 성 앞에 그냥 뚫레뚫레 세워둘리는 만무하고, 몽골군은 그 10만의 병력을 이용해서 양양 주변을 기다랗게 포위하는 포위망을 구축합니다. 그리고 아예 사방에서 진지 공사를 하면서 장기전으로 끌고갈 준비를 했습니다. 물론 양양성의 병력들도 구경만 하지 않고 중간중간 뛰쳐나와 진지 공사를 하는 몽골군을 공격했지만, 숫적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바람에 이런 시도 자체를 저지할수가 없었습니다.
막북도 통일 되었고, 북중국도 점령 되었고, 서하도 멸망했고, 서요도 병합 당했고, 호라즘도 망했고, 대리도 점령 당했고, 이란-페르시아까지 손아귀에 닿았고, 러시아가 지배하에 떨어졌고, 동유럽도 공격 당했고, 고려도 항복한 상황.
포위망을 구축하는 몽골군은 결코 성급하게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교적 양양성과의 직접적인 교전은 자제한 채 계속해서 포위망을 유지하고 늘리고 견고하게 만들었고, 군사를 이끌고 양양성 주변을 순례하며 근처의 송나라군을 몰살, 성 내와 직접적인 연결을 막으려는 작전에만 집중했습니다. 즉, 말려죽이려는 셈입니다.
해자를 파고 성채를 쌓고, 곳곳에는 파수용을 겸한 돈대(燉臺)가 세워졌으며, 양양과 그 근처의 번성까지 한꺼번에 두르는 환성(環城)이라는 이름의 토성이 만들어졌습니다. 심지어 그런 포위망이 한겹도 아니고 이중으로 이어졌으며, 그 둘러싼 포위선을 쭉 펴서 이으면 100km에 이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몽골군은 송나라의 수군이 수로를 통해 공격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환성의 포위선 상류와 하류에서 몽골수군의 훈련을 반복해서 시켰으며, 그것이 대충 끝나면 육상의 각 부대와 연동한 합동 군사훈련이 몇 번이나 반복하여 실시했습니다. 말 그대로 포위전을 몽골 수륙군의 합동 연습장으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쿠빌라이는 이 거대한 전쟁을, 어떠한 전장의 기책이나 우연, 소설에나 나올 법한 신기묘산의 재주로 타개해갈 수 있는 장소가 되지 않도록, 완벽하게 통제했고, 전투, 작전, 편성, 훈련 모든 부분을 일종의 '종합사업' 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양양성에 아무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장이 있고, 불세출의 작전을 떠올린다 한들, 어떠한 변수가 만들어낼 수 없는 그런 환경으로 이끌어버린 겁니다.
그러나 송나라군은 이 철통같은 포위를 뚫고, 성 밖에서 안으로 물자를 제공하는데 성공합니다. 1269년 봄, 강물의 물이 불어나는 틈을 타 하귀(夏貴)가 포위망을 돌파해 물자를 성에 투입한 겁니다. 다만 하귀는 겁이 났는지 성에 입성하진 않고, 성 아래에서 성 위에 있는 양양성을 지키는 사령관 여문환과 몇마디 대화를 나누고 돌아가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그러자 몽골군이 당황한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런식으로 지원이 들어온다고 하면, 포위를 유지하는게 의미가 없으니 말입니다. 다만 얄궃게도, 이럴때 몽골군의 풍부한 인적 인프라가 빛을 발하는데, 다름아닌 한족 출신 장교들이 작전을 내서 활약했습니다. 성벽 포위전에 일가견이 있다는 평을 받던 사천택(史天澤)이 수비를 강화하고, 장홍범(張弘范) 역시 "이런식이면 포위 의미가 없다. 더 확실하게 조여버리자." 라며 안그래도 강력하던 수비라인이 한층 강화되어 더욱 막강해졌습니다. 당연히 기겁한 양양성 내의 병력은 이를 막기 위해 나섰지만, 장홍범은 오히려 이들을 격퇴해버리고 맙니다.
그야말로 몇중으로 쳐진 포위라인.
여기에 더해 본래 남송의 장군이었다가 몽골에 항복한 유정(南宋) 등에 의해 앞서 말한 '몽골 수군' 이 육성되면서, 수천척의 함선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몽골과 남송의 전투라고 하면 몽골족 vs 한족의 전투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실상은 '몽골이 장악한 세계 전부의 기술, 물적 인적 자원력' vs 남송의 대결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하이브리드함 때문에 더 강력하기도 했었고...
이렇게 방위라인이 강력해지다보니, 송나라 역시 외부의 양양성 지원 및 내부에서의 외부와의 연락을 위해 온갖 신출귀몰한 작전은 다 짜냈습니다. 하루는 수영 잘하는 병사를 모집한 다음, 구원 요청을 청하는 작전 개요서를 숨겨 병사의 상투속에 집어넣었고, 그 병사들을 풀더미 속에 숨겨 강에 둥둥 떠가게 했습니다. 아무리 몽골군이 포위를 강하게 하며 감시를 한다한들, '강 위에 떠가는 풀더미' 따위까지 뒤져보진 않을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작전은 실패했고, 들켰습니다. 물론 몽골군이 풀더미 하나까지 다 조사해본건 아닙니다. 다만, 갑자기 강물 위에 떠가는 풀더미를 본 몽골군 병사들이 "야, 갑자기 풀더미가 막 내려오네. 몇개 건져서 말려가지고 떌감이나 쓰자." 고 갈고리 짓을 했는데 이로서 귀신같이 걸려버리고 만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작전은, 적의 포위와 감시만 더 강하게 해주는 결과만 되고 말았습니다.
송나라는 사력을 다해 양양성을 지원하려 했지만, 모든 시도는 몽골군의 압도적인 수비력 앞에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지원하려는 규모가 작았던 것도 아닙니다. 1269년 7월에는 하귀가 재차 전선 3,000척과 군대 5만명을 이끌고 몽고와 전투를 벌여 대패했습니다. 1270년 9월에는 범문호가 전선 2,000척을 이끌고 나섰다가 패배하였으며, 이듬해인 1271년 6월에는 역시 범문호가 10만에 달하는 수군을 이끌고 양양으로의 진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했습니다. 69년부터 71년까지, 양양성 주변의 강에서는 수천여척의 함선과 수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매일같이 뒤엉키고 교전하고 싸우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혼돈의 장이었던 셈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외부의 송나라군은 양양성을 지원하기 위해 특수부대, 즉 결사대를 조직하기에 이릅니다. 특별히 용감한 3,000명의 병사가 선발되었고, 용맹하고 지혜로워 모든 장병들에게 존중받던 장귀와 장순이라는 두 장군을 특별히 뽑아 이들을 맡겼습니다. 장귀는 체구가 비교적 왜소했기에 '왜장' 이라고 불렸고, 장순은 죽원 출신이었기에 '죽원장' 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이 왜장과 죽원장은 결사대를 소집해서 출발전에 연설을 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죽으러 가는 것이다."
"목숨을 바치러 가는 것이지, 살고자 가는 것이 아니다. 혹여 이번 작전에 참가하는걸 마음속으로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대오에서 빠지거라. 대사를 그르칠 순 없다."
그러자 오히려 모든 결사대원들이 의기가 충전해져서 분투한것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결사대원들은 몽골 수군이 빽빽하게 차 있는 곳을 향해 '자살특공대' 나 다름없는 공격을 퍼부었고, 120여리를 가는 동안 엄청난 전투를 겪은 끝에 기적처럼 돌파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지원군을 구경하는것은 거의 포기하고 있던 성내에서는 지원이 도착하자 감격해하며 사기가 올랐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순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갑옷을 입은 시신이 떠내려왔는데, 건져놓고 보니 장순이었습니다. 장순의 몸에는 화살이 여섯개나 꽂혀 있었고, 네 곳에 상처가 났던 상태였습니다.
양양성을 지키던 여문환은 장귀에게 같이 계속 여기서 싸우자고 권했지만, 장귀는 결사대를 이끌고 돌아가서 연락망을 구축하겠다며 떠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성내에서 나가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바, 외부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수영과 잠수를 잘하는 사람 두 명을 몰래 먼저 파견해 외부와 연락케 했습니다. 이 당시 몽골군은 물 속에 쇠사슬 수십개를 설치하고 말뚝까지 박아놓은 상태였는데, 이 두 명은 톱을 가지고 잠수해서 조금씩 이를 잘라 결국 뚫고 나가는데 성공했고, 결국 외부와 연락을 한뒤 다시 돌아오는것까지 성공했습니다.
어렵사리 연결된 작전에 따르면, 장귀의 결사대가 빠져 나오면 성 밖에 있던 하귀가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이들을 수습해가는 것이 요지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출발을 하려고 보니, 결사대원 중에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무언가 실수를 저질러 곤장을 맞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곤장까지 맞고 앙심을 품은채 사라진 사람이 어디로 갈지는 뻔한 일이라... 작전은 곧 들통난다고 봐야겠지만, 장귀는 "이제 계획은 곧 탄로나게 되었지만, 서둘러 출동하면 저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빠져나갈수 있을지도 모른다." 며 출동을 감행했습니다.
장귀의 결사대는 곧 적의 습격을 받았지만, 믿을 수 없는 용맹과 기적까지 더해진 덕분에 탈출에 성공했고, 목적지까지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에 도달하자 곧 함선이 보였고, 미리 약속해 두었던 하귀의 부대와 만나게 되었다고 여긴 장병들은 모두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뻐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무렵, 결사대원들이 빠져나갔는지 알 수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양양성 앞에 4명의 송나라 병사들이 나타났습니다. 아니, 이렇게 포위가 삼엄한데 어떻게 포위망을 뚫고 온건가? 어리둥절한 양양성의 군사들 앞에 4명의 송나라 병사들이 무언가를 들이밀었는데,
다름 아닌 장귀의 시체였습니다.
그 4명의 송나라 병사들은 이미 진작에 몽골에 항복한 병사들이었고, 병사들이 가지고 온건 결사대를 이끌고 나간 장귀의 죽은 시체였던 겁니다. 그리고 몽골군은 장귀의 시체를 보이며 이런 말을 양양성에 전했습니다.
"너희들은 왜장 도통을 아는가? 이것이 바로 그의 시체이다."
사실은 이렇습니다. 작전 이틀전에 풍랑이 불어 하귀의 군사들은 목적지에 오지도 못했고, 투항병을 통해 정보를 얻어들은 몽골군은 미리 약속 장소를 장악하고 가만히 앉아 쉬고 있다가 온갖 고생을 하고 도착한 결사대를 습격한 겁니다. 죽을 고생을 하고 간신히 사지를 벗어나와, 그런 그들을 반겨주는 아군인줄 알았던 함선들이 사실은 적의 함선들이라는것을 안 장병들은 싸울 의지를 모두 잃어버리고 학살당했고, 장귀 역시 사로잡혀서 투항을 거절한 끝에 결국 처형 당하고 말았습니다.
죽은 장귀를 본 양양성내의 송나라 병사들은 모두 통곡을 멈추지 않았고,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지고 맙니다.
그나마 이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최후의 결사대 마저도 결국 적의 조리돌림 신세로 전락한 이후, 양양성을 향한 모든 지원은 끊겼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양양성은 버티고 있었습니다.
수십만의 군대를 동원하고, 수천여척의 함선을 동원하고, 무려 5년이 넘게 포위를 지속하는데도, 저 가공할 저력을 가진 성은 무너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한 사람은 바로 장홍범이었습니다. 양양성 주변의 번성을 공격하다가 부상을 입은 장홍범은 "번성이다. 번성을 함락해야 한다. 번성과 양양은 순망치한이니, 번성만 함락하면 양양이 무엇을 믿고 버티겠는가?" 하고 주공을 번성으로 돌려야 한다는 의견을 전했고, 이를 쿠빌라이가 받아들였습니다.
앞서 몽골군의 힘을 한족 병사도 흡수하고 수군도 만드는 '하이브리드' 함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때 번성 함락 작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중동의 훌레구 울루스에서 온 이슬람 기술자가 만든 회회포(回回砲)가 중국 강남의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회회포의 공격으로 번성의 성벽이 무너졌고, 그 사이로 몽골군이 물밑듯이 쏟아져왔습니다. 번성을 지키던 수비대장 범천순은 미친듯이 쏟아져오는 몽골군을 보더니, 하늘을 우러러 보며 한탄했습니다.
"나는 살아서 송나라의 신하가 되었으니, 마땅히 죽어서도 송나라의 귀신이 되리라!"
그리고 목을 메어 죽었습니다.
번성을 지키던 또다른 장수인 우부는 백여명의 결사대로 무수하게 많은 적병을 베어내며 저항했지만, 결국 중과부적으로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되자 기둥에 스스로 머리를 찍은 뒤, 불길속에 몸을 던져 자결했습니다.
여문환
번성이 함락된 후 다음 목적은 말할것도 없이 당연히 양양이었습니다. 번성이 함락당해 심리적인 위안을 나눌 최후의 방벽도 사라졌고, 번성을 무너뜨린 회회포는 매일같이 양양을 포격하고 있었습니다. 양식은 떨어져가고, 지원은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성내의 분위기는 최악이 되어갔습니다.
이미 투항해서 달아나는 장병들도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성을 지키던 여문환은 매일같이 순시를 했고, 매일같이 통곡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절망적인 저항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번성 함락으로 여유가 생긴 몽골군 측에서는 이제 곧 양양의 함락은 시간문제로 여기고 있었지만, 여문환에 대해서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대로 함락 작전으로 간다면 필시 여문환은 전사하거나 성이 함락 되는 중에 자살할게 분명했습니다.
"여문환의 일가는 대대로 남송의 중요 무직을 거쳤다. 중앙 정계의 요직 가운데 일족 자제들도 많다. 이러한 관계로 여문환은 남송 조야에 있어 누가 현명하고 누가 어리석은지, 남송 산하의 성곽 가운데 어느 것이 견고하고 어느 것이 허술한지, 또한 남송 군대의 많고 적음과 그 허실이라든가, 남송 군사 및 정치의 옳고 그름에 이르기까지 모르는 것이 없는 인물이다."
몽골군 내부에서는 '여문환은 죽게 두는것보단 살려서 유용하게 쓰는게 좋은 인재다.' 라는 의견이 강했고, 여문환을 항복시키기 위해 사람을 파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여문환의 부하였다가 몽골에 투항한 당영견(唐永堅)을 보내 설득했으나 여문환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몽골의 아릭카야라는 인물이 호위병 몇 사람만 거느리고 양양성 아래로 가 여문환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대는 실로 몇 년 동안이나 고립된 군대를 이끌고 양양성을 지켜왔도다! 그러나 이제는 나는 새라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우리 황제께서는 그대의 충성스러움을 가상히 여기고 계시다. 만일 투항한다면 필시 높은 관직을 내리실 것이다. 우린 결코 그대를 죽이지 않겠다."
여문환이 머뭇거리자, 아릭카야는 화살을 부러뜨리며 맹세했습니다. 아릭카야의 옆에 있던 장정진(張庭珍)도 거들었습니다.
"우리 군대는 일찍이 전세계를 공격하여 무너뜨리지 못한 곳이 없었다. 그대는 고립된 성에 갇혀 있고 이제 탈출로도 끊겼다. 바깥으로는 지원군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대는 성을 지키다 죽었노라는 헛된 공명을 바라고 있는가? 그렇다면 성내의 사람들은 무슨 죄란 말이냐?"
이 말을 들은 여문환의 부하들이 먼저 나서 "할만큼 했다" 며 투항을 간곡하게 요청하자, 결국 여문환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투항을 하고 말았습니다. 장홍범은 여문환을 데리고 쿠빌라이를 알현케 했습니다.
바얀
양양성이 함락된 시점에서 송나라의 멸망을 정해진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이 신임하는 장수인 명장 바얀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이제는 무너진 방위라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돌파하여 중국 남부로 파죽지세로 진격했고, 여문환 등이 여기에 함께 했습니다.
양자강을 건너 진군하려던 바얀의 앞에 송나라 수군이 나타나자, 바얀은 "항복하라" 며 4일 동안 회유했지만, 항복한 송나라 장수는 단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송나라 수군의 결사항전에 바얀의 군대도 상당히 고전했으나, 작전을 바꿔 철기병을 멀리 우회해 따로 상륙시켜 후방에서 적을 동요케 하자 심리적으로 흔들린 송나라 수군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최후의 장벽도 무너지자, 마침내 재상 가사도가 13만 대군을 이끌고 나섰으나, 이 마지막 군대도 바얀의 20만 대군에게 결국 패배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조직된 정부 차원의 송나라의 저항은 끝이 난 셈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곧 수도 임안이 함락되었고, 송나라의 공제도 원나라의 수도 대도로 끌려갔습니다.
그런데 수도가 무너지고 황제가 끌려가는 상황이었지만, 아직 송나라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장세걸, 육수부, 문천상 등의 일부 대신들은 익왕 조하와 광왕 조병이라는 두 황족을 데리고 푸저우로 이동해서 망명정부를 만들어 계속 저항을 이어갔습니다. 물론 바얀은 이런 그들을 잡으려 했지만, 망명정부파의 양진이라는 인물이 "내가 저들의 진영에 가서 시간을 벌겠다." 며 대놓고 가서 사로잡히면서 시간을 벌었고, 그 사이에 나머지 인물들은 도망치는데 성공한 겁니다. 결국 푸저우까지 함락 당하자, 이들은 홍콩 근처까지 도주해서 계속 정부를 이어나갔습니다.
더 이상 갈수도 없는 바다 끝까지 몰릴때까지 이어지는 송나라의 저항
그리하여 홍콩 근처의 애산에서 소략한 임시 정부를 꾸린 최후의 잔존세력은, 군-민을 합쳐 모두 20만명 가까이 되었습니다.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정부' 의 기틀은 거의 다 육수부가 전담해서 책임졌는데, 육수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꼿꼿하게 행동하다가도, 조정이나 군대에 혼자 있게 되면 늘 비통한 생각에 눈물을 흘렸으며, 그 모습을 본 다른 사람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쿠빌라이는 이 조그마한 망명 정부 조차도 남겨놓을 생각이 전혀 없었고, 망명정부를 지도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그 군대를 이끈 사령관은 장홍범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장홍범과 장세걸은 친척 사이였습니다. 두 친척이 최후의 결전에서 맞붙게 된 겁니다.
싸움에 앞서 누군가가 장세걸에게 "원군이 애산으로의 입구를 차단하면 우리 모두는 갇히고 만다. 좀 더 이동해서 싸우자. 이기면 나라의 복이고, 지면 물러나서 훗날을 기약하면 된다." 고 말했지만, 계속되는 도주생활에 지친데다 만약 움직이면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달아날까봐 두려웠던 장세걸은 "언제까지 도망을 치겠나. 어쨌든 여기에서 다 끝내자." 며 이를 거절했습니다.
장홍범은 싸움에 앞서 사람을 보내 친척인 장세걸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무려 세번을 권했지만, 장세걸은 이렇게 거절했습니다.
"나 역시 항복이 무슨 말인지 안다. 생명의 귀중하다는 사실 역시 모르는 사람이 아니다. 단지, 주군을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변심하지 않으려는 것 뿐이다."
장세걸이 말을 듣지 않자, 장홍범은 당시 몽골군의 포로로 잡힌 문천상에게 장세걸을 항복시키는 편지를 쓰라고 요구했습니다. 문천상이 거절했지만 장홍범이 계속 요구하자, 문천상은 다른 시 한편을 써서 보여주었습니다.
예로부터 누구나 인생은 한번 죽는 법.
단지 일편단심 보존하여, 역사에 길이 남겨야 할 뿐
이를 본 장홍범은 헛웃음을 지었고, 더 이상 편지를 쓰라고 요구하진 않았습니다.
함대전으로 펼쳐진 애산 전투의 초반은 장세걸이 이끄는 부대가 유리해보였지만, 장홍범은 물러나서 풍악을 올리며 쉬는척을 하더니 이내 포위전을 개시했고, 포위당한 송나라 병사들은 먹을게 없어 바닷물을 마시고 구토하며 버텼으나 결국 완전히 대패하고 말았습니다. 수백척이나 되는 함선이 가라앉았고, 수만명이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이때 육수부는 완전히 패망하기 직전까지도 7살이 된 황제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이 확정되자, 어린 황제와 함께 같이 물어 뛰어 들었습니다.
황제의 어머니인 양태후는 패전의 대혼돈 속에서 구출되었으나,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내가 더 살아서 무엇을 하겠나" 며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했습니다.
장세걸은 전투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양태후의 시신을 수습해 제를 올리고, 안남 지역으로 재기를 위해 떠나려 했는데, 떄마침 태풍이 불어닥쳤습니다. 그러자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신이 조 씨를 위해 힘쓸 일은 이제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정녕 이것이 하늘의 뜻입니까? 하늘이 만약 송을 망하게 하려는 것이 그 뜻이라면, 신 역시 이 바다에 잠겨 죽게 해주소서."
이윽고 거대한 풍랑과 함께, 장세걸의 배도 뒤집히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송나라는 멸망했습니다. 세계 최강의 국가의, 가장 강력한 군단을 상대로, 가장 오랫동안 맞서 싸운 끝에 이 세상의 땅 끝에서 황제도 태후도 대장군도 재상도 한 사람도 남지 않고 전부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13세기 몽고기병이 폭풍처럼 유라시아를 석권할 당시, 그들은 오직 남송에서만 가장 격렬하고 지속적인 저항을 받았다. 1235년 원나라 군대가 처음 송을 공격했을 때 부터, 1279년 광동 애산에서 남송 최후의 승상 육수부가 어린 황제를 등에 업고 바다에 뛰어내릴 때 까지, 남송은 장장 40여년간 전쟁을 벌여 몽케 칸 또한 합주 조어성에서 전사하였다.
장원급제 출신 재상 문천상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이 최후의 궁지에서도 혈전을 벌이며 송 황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일은, 조송(趙宋)의 제실(帝室)이 300년간 사대부를 우대한 것에 대한 최선의 보답이었으며, 송대 문관정치가 거둔 유종의 미 그 자체였다.
-중국 과거 문화사 中-
몽골과 남송의 전쟁은 40년이 넘게 펼쳐진 전쟁이고, 수십만의 대군이 참여했으며, 수천여척의 함선이 동원되었으며, 유목민족과 한인, 중동의 기술이 모두 뒤엉킨 그야말로 대격전이었습니다.
송나라는 역대 중국사의 왕조들 중에서도 유독 허약한 이미지가 강하고, 수 많은 송군 굴욕의 역사 일화가 조롱거리로 언급되는 등등 송나라 사람들은 "책이나 읽고 글이나 외울 줄 알지 '상무정신' 이 없어서 칼들고 싸울줄 모르는 인간들." 이라는 식으로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실제로 송나라가 기질적으로 허약한 나라였을진 모릅니다. 그러나, 역대 어느 왕조와 비교해도 더 장렬하게 순국하고 끝까지 뜻을 꺾지 않고, 변절하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평을 듣기도 합니다.
물론 송나라가 멸망할때도, 요직에 있다가 자리를 버리고 도망친 조정대신이 '수십 명' 가량 없는것은 아닙니다. 당시 송나라의 태황태후는 "우리나라가, 사대부를 예로 대접하기를, 300년을 하였것만." 이라고 탄식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조익이 이십이사차기에서,
"역대 이래 몸을 던지며 나라에 순국한 자는 유독 송 말에 많았다. 패망을 구하진 못했다고 해도, 요컨대 나라가 사대부를 양성한 보람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는 평을 하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참 묘한 서사인것 같습니다. 그 수많은 중국사의 왕조 중에서도, 가장 허약하다며 일반인들에게 조롱받는 나라의 '약골' 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를 상대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결사적으로 싸웠다...
소위 말하는 '강함' 이라는건 참 여러가지가 있구나 싶네요.
출처https://pgr21.com/pb/pb.php?id=freedom&no=73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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